{"slug":"A0j-bR","url":"https://popup2026.com/A0j-bR","kind":"html","title":"이윤이라는 이름의 대리 지표","description":"기업이 측정하는 단 하나가 이윤이 되는 순간, 그 대리 지표는 목표의 자리를 슬그머니 차지한다. 지난봄, 한 제약회사 임원과 마주 앉은 적이 있다. 그는 자사의 신약 파이프라인을 설명하면서, 어느 순간 목소리를 낮추고 이렇게 덧붙였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가장 돈을 잘 버는 건…","createdVia":"web-html","createdAt":"2026-06-24T09:25:41.138336+00:00","lastEditedAt":null,"viewCount":0,"forkedFrom":null,"forkCount":0,"agentCreated":false,"text":"이윤이라는 이름의 대리 지표 \n \n \n \n \n 이윤이라는 이름의 대리 지표\n\n 기업이 측정하는 단 하나가 이윤이 되는 순간, 그 대리 지표는 목표의 자리를 슬그머니 차지한다.\n\n 지난봄, 한 제약회사 임원과 마주 앉은 적이 있다. 그는 자사의 신약 파이프라인을 설명하면서, 어느 순간 목소리를 낮추고 이렇게 덧붙였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가장 돈을 잘 버는 건 사람을 낫게 하는 약이 아닙니다. 낫지 않게, 그러나 죽지도 않게 붙잡아두는 약이죠.\" 그는 농담처럼 웃었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그 문장 안에 우리 시대 자본주의의 가장 정교한 오작동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n\n 기업은 무언가를 최대화하도록 설계된 기계다. 문제는 그 '무언가'가 거의 언제나 진짜 목표가 아니라 그것의 대리 지표(proxy)라는 데 있다. 우리는 건강을 측정할 수 없으니 의료비 지출을, 교육을 측정할 수 없으니 시험 점수를, 가치를 측정할 수 없으니 분기 이윤을 대신 센다. 그리고 측정되는 순간, 대리 지표는 슬그머니 주인의 자리를 차지한다. 영국의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가 일찍이 경고했듯, 측정이 목표가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좋은 측정이 아니게 된다.\n\n 이윤을 기업의 유일한 프록시로 삼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보자. 이윤은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내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장 절박하게, 가장 반복적으로 돈을 내는 것은 무엇인가.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채 관리되는 고통이다. 완치되는 환자는 한 번 결제하고 떠나지만, 의존하는 환자는 평생 결제한다. 순수하게 이윤만을 좇는 합리적 기업이라면, 전자가 아니라 후자를 만드는 쪽으로 미끄러져 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마약은 이 논리의 가장 노골적인 종착점일 뿐이다. 중독은 완벽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 수요가 스스로를 재생산하니까.\n\n 물론 현실의 제약산업 전체가 마약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진심으로 사람을 살리려 밤을 새운다. 하지만 그 선의는 시스템의 인센티브와 끊임없이 마찰한다. 미국의 오피오이드 위기는 악당들이 음모를 꾸며 일어난 일이 아니다. 통증 관리라는 정당한 목표가 '처방량'이라는 대리 지표로 번역되고, 그 지표가 다시 매출과 보너스로 연결되는, 지극히 합리적인 각 단계의 결정들이 모여 수십만의 죽음을 만들었다. 누구도 사악하지 않았는데 결과는 사악했다. 이것이 잘못된 프록시의 무서움이다.\n\n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이윤을 추구하지 말라'는 도덕적 훈계는 공허하다. 기업은 굶으면 죽고, 죽은 기업은 누구도 돕지 못한다. 핵심은 이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목적이 아닌 결과의 자리로 되돌려놓는 일이다. 좋은 기업은 '어떻게 돈을 벌까'를 묻기 전에 '우리가 사라지면 세상에서 무엇이 사라지는가'를 묻는다. 진짜 문제를 풀면 돈은 그 풀이의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반대로 돈을 직접 겨냥하면, 풀이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림자만 거대해진다.\n\n 내가 아는 가장 건강한 조직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진짜 목표를 집요하게 언어화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시장 점유율'이 아니라 '우리가 없으면 환자가 겪을 구체적인 불편'을 이야기했고, '사용자 참여 시간'이 아니라 '사용자의 삶이 실제로 나아졌는가'를 물었다. 대리 지표를 쓰되, 그것이 대리일 뿐임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프록시와 본체를 혼동하지 않는 이 작은 규율이, 결국 마약을 만드는 회사와 약을 만드는 회사를 가른다.\n\n 앞서 그 임원과 헤어지며, 나는 묻고 싶었던 질문을 끝내 하지 못했다. 당신 회사의 진짜 목표는 무엇입니까. 사람을 낫게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이 계속 돈을 내게 하는 것입니까. 대부분의 조직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한 번도 스스로에게 물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묻지 않는다고 해서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답은 매 분기, 그들이 무엇을 최대화하는지를 통해 조용히, 그리고 정확하게 드러난다.","alternates":{"markdown":"https://popup2026.com/A0j-bR.md","json":"https://popup2026.com/A0j-bR.json","html":"https://popup2026.com/A0j-bR"}}